Crititque Korean



두 개의 세계, 혹은 그 너머

-정문경 신작에 관한 짧은 메모

 

여경환 (예술학, 큐레이터)

Kyung-hwan Yeo | Art Theory, Curator

 

1.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멀리서 보면 그것은 유성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수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죠. 두 개의 위성이 그리는 궤도가 우연히 겹칠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고 어쩌면 마음을 풀어 합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의 일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되는 거에요. 언젠가 완전히 타버려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들』 중에서

 

2.

중첩된 콜라주의 층들이 만들어내는 두툼한 마띠에르와 검은 그림, 밝은 그림, 그리고 레드 시리즈처럼 강렬한 색채의 무게를 떠올리던 나의 상상은 정문경 작업실의 문을 열자마자 증발해버렸다. 작업실 안의 공기는 가벼웠고 빛은 따뜻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공기와 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의 온기는 신작들이 펼쳐진 작업대 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것을 향해 다가서는 나를(혹은 타인을) 반기면서도 자신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 기묘한 환대(hospitality)에 가까웠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캔버스들은 캔버스 천 대신 견을 사용해 틀을 짜고, 그 틀 아래에 나무 밑판을 대어 그 위에 또 다른 그림을 배치함으로써 그 둘은 쌍을 이루어 하나의 작품이 된다. 견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견화(), 견 캔버스 틀 밑의 콜라주와 드로잉 등을 이용한 바탕 그림,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조합은 일상적이면서도 우연적이다.

 

3.

정문경은 2013 11월부터 1달간 미국 버몬트에 있는 국제 레지던시, 버몬트 스튜디오 센터(The Vermont Studio Center)에 머무르며 이번 신작들을 본격적으로 작업했다. 집과 강의로 꽉 짜여진 일상을 떠나 외국의 적막한 시골마을 스튜디오에로의 완전한 고립, 동료 작가들이나 방문 예술가들(visiting artists)과 교류 프로그램을 통한 활발한 소통이 조화를 이뤘던 버몬트에서의 시간은, 비록 한달 이었지만, 구상만하고 있던 신작을 구체화하고 실험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고 한다. 2012년 전통 한국 무용에 관한 책의 삽화로 견화 작업을 하면서 다가가기 시작한 견이라는 소재는 한지, 마대 등의 한국의 전통 재료를 사용해왔던 그녀의 작업과 연장선에 있지만 분명한 차별성을 가진다. 견은 투명하면서 불투명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지니며, 전통적이지만 현대적인 재료다. 한국과 외국, 작업과 가정, 동양화와 서양화라는 대립된 항들 속에서 자신의 길에 대한 질문을 이어온 정문경이 작업이 그 끝없이 갈라지고 모아지는 길들을 통과해 온 것처럼, 견이 만들어내는 섬세하고도 정교한 겹겹의 층들(layers)은 그녀의 여정을 은유하는 동시에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은밀한 열림을 품고 있는 공간을 상징한다.

 

4.

자신의 대립된 정체성들을 사이의 충돌과 그 충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생성의 지점들을 형상해내기 위한 전략으로써 콜라주는 정문경의 트레이드 마크다. 이번 신작에서 그녀의 콜라주가 어떻게 변형되고 반복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바탕그림은 신문지나 색지 등을 오려 붙인 후 여고생 때 입었던 교복, 사생대회장이 열렸던 고궁의 처마 등 자신의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불완전한 기억의 편린들에 대한 무작위적인 드로잉을 결합한 콜라주로 구성된다. 견 캔버스 틀 위에 그려진 견화는 이러한 과거의 무의식이 현재의 자아에 의해 편집되고 정돈된 흔적들을 보여준다. 나아가 시간에 의해 망각되고 은폐되는 기억 기제 자체를 보여주는 일종의 자동기술법(automatism)적 콜라주가 바탕그림과 견화 사이가 만들어내는 공간 속을 가로지른다.

 

5.

이제 누구도 쉽게 순수한 예술의 진정성을 믿기는 어렵다. 예술은 그리 거창하거나 강력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예술이라는 신화를 위한 신화들의 겹겹을 벗겨내고 난 그 속살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없는 비루함에 대한 고백, 거대한 세상의 불투명함 앞에 너무나 취약한 예술의 무력함일 것이다. 아직도 예술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면, 불투명한 세상과 투명한 자신 사이를 끊임없이 공전하고 그 과정을 기록하는 처연한 노력에 있다. 정문경은 자신의 여정을 멈추지 않는다. 두 개의 세계의 조합, 그리고 끊임없는 불일치의 과정 속에서도 길을 찾고 여전히 미지를 향한 자신의 궤도를 멈추지 않는다. ‘언젠가 완전히 타버려 제로가 될 때까지’ 그러할 것이다.

 

 

 

 

 

 

 

 

 

 

 

 

 

 

 

정체성의 탐구로서의 조형 언어

 

 

 

 

 

박철화(중앙대학교 예술대 교수)

 

 

 

표상이든, 표현이든, 형식이든, 아니면 제도로든 예술작품의 비밀을 해명하려는 많은 개념 틀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에 대한 보편적 설득력을 갖는 답은 없는 같다. 그런데 비밀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사실은 얼핏 불행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한 대목이기도 하다. 해답이 없는 모호함을 운명처럼 껴안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불행이겠으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비밀을 찾아 새로운 모색을 있다는 차원에서는 행복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존재와 세계의 새로운 모습을 찾기 위해

없이 움직이는 인간의 노력, 영혼의 여행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예술, 현대예술(modern art) '새로움 창조를 자신의 존재이유로 삼고 있다. 대혁명 이전 구체제 속에서의 예술이 세계를 장식하는 기술(ars 또는 techne) 가까운 것이었다면, 현대예술은 기존의 세계와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낡은 세계를 떠나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는 모험이었다. 물론 그것은 많은 경우 단절로서의 결별이면서 동시에 끌어안음으로서의 감싸기였다. 하지만 어쨌든 낡은 인습의 굴레를 벗어나, 굳어진 감각과 인식을 거부하며 새로운 삶과 세계의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일은 현대예술에 주어진 과제이자 특권이었다. 새로워야 하기에 떠나는 것이다. 점을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인간은 노력하는 방황하기 마련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정문경은 일찍이 자신의 작업을이라는 테마로 설명한 적이 있다. “이전의 작업에서 수없이 덧칠된 물감을 지워내고 비워진 공간에 길의 흔적을 남기며, 무언가를 그리고, 다시 닦아내고 하는 것은 불확실한 삶의 길을 형상화 것이다. 이번 작품들에선 절대가치를 향하여 맴돌고 있는 나의 길을 주제로 담아보았다.” 사실 작가가 마주하고 있는 종이 혹은 캔버스란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며, 위를 오가는 선과 색은 영혼의 얼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몸짓이라 있다.

 

물론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존재는 자연이 그러하듯 변하는 것이며, 생명으로서의 움직임을 갖는다. 예술이 매순간 길을 떠나는 여행이 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지금의 이면서, 내가 아니다. ‘분명한 죽음을 통해서만 만날 있으며, 생명으로서의 우리는 끊임없이새로운 변해가기 때문이다. 가장 멀리까지 확장되고, 가장 높이까지 승화될 자아(自我)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정문경의 작업은 그런 변화와 생성의 여정을 보여준다. 한국화를 전공하고서도 20대에 일찌감치 뉴욕에 가서 서양화를 공부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번씩 작업과 생활의 근거지를 옮겨가며 계속해서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종이와 캔버스를 포함한 다양한 재료와 색과 기법을 통해 그의 작업은 동양과 서양, 예술과 현실, 전통과 실험, 구축과 해체의 과제를 아우른다. 때로는 덧붙이고 때로는 지워내면서 그는 어느 순간 드러나는 이미지를 탐구하는데, 이미지란 바로 자아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아는 고정된 것도 단일한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자아란 친숙하면서도 낯선 무엇이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얼굴이 달라지는,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미끄러져 달아나는, ‘미지(未知)’ 복합적 생성이 바로 자아다. 정문경이 자신의 작업을 ‘Journey to the Unknown’이라는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친숙한지금의 떠나는 부정(否定) 통해서만 미지의진정한 만날 생성의 가능성을 얻는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과 생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영혼의 얼굴을 찾는 일이야말로 예술로서의 여행이다.

 

그의 최근 작업은 콜라주다. 그런데 콜라주의 재료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익숙한 사물들이다.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겨 말하자면, 우리의 자아란 일상을 떠날 없으며, 설령 일상을 떠났다 하더라도, 위대한 신화의 여행이 모두 그러하듯 결국 일상으로 돌아온다. 물론 보다 성숙한 자아로서 돌아온다는 것이 안에는 전제되어 있다. 정문경의 콜라주는 그런 여행의 성격을 갖는다. 일상의 사물을 붙이고 떼어내며 이동시킴으로써, 자신의 친숙한 자아를 떼어내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 다른 자아를 발견하는 . 정문경이 자신의 콜라주를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라는 말로 정리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적확(的確)하고 예리하다.

 

따라서 그의 콜라주는 일상에 대한 사랑의 제의라 있다. 친숙한 자아와 결별하면서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란 일상과함께 다시 태어나기위한 실존의 모험이다. 모험이 없다면 자아에게 일상이란 감옥일 뿐이며, 우리의 자아는 모험을 통해서만 생성의 가능성으로서유동적 자유 얻을 있다. 그러니 진정한 떠남은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 다시 돌아오는 사랑이며, 여행은 사랑의 에너지가 충만하다는 점에서 즐거운 축제다. 정문경의 최근 작품에 ‘Dance’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작업 자체가 축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드로잉 작업이다. 거기에는 한국화의 색채와 운필(運筆), 현대적 용어로 바꾸자면브러쉬 스토로크(brush stroke)’ 들어있다. 한국화에서 장지에 색을 올리고, 지우고, 선을 긋는 일은 서양화의 콜라주에서 붙이고, 떼어내고, 이동하는 일과 본질적으로 같은 속성을 지닌다. 정문경의 드로잉은 그런 점에서 한국화와 서양화를 기법의 차원에서 이어주는 징검다리이며, 동시에 그의 자아 탐구가 일관된 것임을 보여주는 궤적이다. 얼핏 분방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의유동적 자유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작가로서의 생명력의 표현인 것이다. ‘존재의 이라 부를 있을 조형 언어의 축제가 기꺼이 우리를 부르는 것은 그래서 그대로 자연스럽다.

 

 

 

 

 

 

 

 

 

 

 

 

 

인생에 대한 관조와 구원이 담긴 풍경

 

 

 

 

 

 

조송식(동양미학)

 

 

 

"날로 새롭게 변하는 것을 위대한 "(『주역』)이라 했던가. 자신의 모습을 언제나 새롭게 변신시키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름답다고 한다. 특히 예술가의 경우 그러한 모습을 보면 심지어 숭고하기까지 하고, 또한 그러한 자취로서 작품을 마주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즐거움의 경지에 이른다. 이것은 작품의 좋고 나쁨의 외부적 평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주는 생명의 힘을 의미한다

 

작가에게 생명적 힘은 연속과 새로움으로 되어 있다. 동양예술의 개념으로 말하면 () ()이며, 현대적인 개념으로는 보편성과 개별성으로 환원될 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 대상과 , 안과 밖의 관계를 형성한다. 작가에게서 이러한 가지 요소를 포괄하여 제시하는 주제는이다. 작가의에는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구도자의 같은 종교적인 의미, ‘인생 같은 삶의 여정, ‘고갯길 같은 자연풍경. 그녀의 작품세계에서는 가지 요소가 모여 있되, 자연풍경이 언제나 중심을 이룬다. 다만 자연풍경에 다른 요소가 어떤 색조로 나타나느냐에 따라 작품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전의 1 개인전에서 인생의 여정을 자연의 길로 투영시켰다. 여기에서 보여주고자 것은 무엇보다도 제작행위의 흔적이다. “수없이 덧칠된 물감을 지워내고 비워진 공간에 길의 흔적을 남기며, 무언가를 그리고 다시 닦아내고 하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불확실한 삶의 길을 형상화하는(99’SEAF 작가노트)” 자체였다. 수많이 교차된 인생여정을 여러 행위의 반복으로 실현하고 결과로서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물론 수없이 반복되어 나타난 선은 자연의 형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행위는 작가에게서 구체적으로 경험된 과거의 것이었기에, 이에 상응하는 표현은 감정적이며 무규정적이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전체적인 행위를 하나로 응집시켰다. 그것은 바로 인생이다. 여기에 인생에 대한관조구원이라는 자신의 물음을 던져 놓았다. ‘관조 연작된 대작에서 시도되었고, ‘구원 여러 소품으로 독립적으로 또는 연작 시리즈로 제작된 작품에서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현재의 작가의 실존과 갈등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정조(情調) 따라 하나는검은 그림으로, 다른 하나는밝은 그림으로 분류될 있다.     

 

검은 그림 허무적이고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깊이와 관조로서, “오묘하고 또한 오묘한(『노자』)” 맛을 지닌다. 이전의 개인전에서 다소 모호하고 분절적인 인생 길은 이번에는 자연 경계로 바뀌었다. 인생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자연 경계로 옮겨놓아진 것이다. 거기에는 깊이가 있다. 정감이 있다. 마을, , 호수, 언덕, 고개 주변에서 흔히 있는 요소가 등장한다. 이것은 평범한 소재이지만, 평범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보편성을 띠기 때문에. 그렇다고 쉽게 참람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에게 시간의 흐름, 의식의 흐름 속에서 강하게 인상으로 남아 있는 경험을 묶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자연소재의 보편성과 작가의 주관성을 통일시키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작가는 이를 위해 자연의 대상을 단순화하고 왜곡하고 과장하여 자연의 형상을 최소한으로 남겨놓은 반면에, 오히려 자연의 대상 안에 작가의 인생 길에 대한 관념을 최대한으로 투영시켜 놓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때로는 땅과 생명을 상징하는 마대를 오브제화 하였는데, 이것은 유기적 형태와 강직한 노란 직선과 함께 인생의 길을 자연의 경계로 바꾸어 놓는 일조를 한다.

 

인생은 수많은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경험에는 감정을 수반한다. 따라서 인생은 수많은 감정을 함축하는 정조를 띤다. 감정은 처음에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이지만 감정이 누적된 인생에 대한 정조는 보편적이고 철학적이다. 작가가 이를 위해 전통적인 용묵에 유난히 애착을 보인다. 동양화라서가 아니라 작가의 인생에 대한 정조를 표현할 있는 유일한 매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개별적인 색이 아니라 모든 개별적 색이 함축되고 있는 그래서오색 갖추고 있다고 하는 현묵(玄墨) 반복적으로 칠함으로써, 시간적 지속에 따라 누적되어 가는 수많은 작가의 개인적 감정을 스며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지속되면 될수록 감성은 풍부하여지고 깊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인생의 보편적 삶에 대한 정조로 점차적으로 승화되어 간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조형성에서 전통산수화의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같다.

 

밝은 그림 다른 작가의 실존을 나타낸다. ‘검은 그림에서 구현되는 인생의 관조와는 달리 종교적 구원과 귀의가 주제이다. 관조와 구원, 상반된 요소가 어떻게 작가에게 양립될 있을까. 이것은 동양인으로서의 감성적 삶과 개인적 종교와의 균형에서 기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업은 99’SEAF에서부터 보여온 것으로서절대가치를 향하여 맴돌고 있는 나의 길을 주제로 담아 것이다(99’SEAF 작가노트).” 때에는 개의 소품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작가에서 갖는 위상을 없었다. 이번 개인전에서 앞의검은 그림 함께 보여줌으로써 분명하게 것이다. 바로 종교적 신앙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는 이러한 작품은 하면 심리적으로 편안하다고 한다. 작품은 주로 마대와 한지를 붙이면서 전체적으로 기하학적 형태의 구성적인 면을 강조시켰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정지되어 있고 현실적 긴장이 없는 신에 대한 조형이며, 밝은 분위기는 기독교적인 빛을 상징한다. 수묵담채를 은은하게 하면서 따사로운 인간적 감정을 감돌게 하고, 위에 여러 혼합 재료, 특히 연필이나 목탄 또는 수묵으로 드로잉 하거나 얼룩지게 하였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작가 자신의 길을 상징한다. 전체적으로 절대적 신에게 귀의된 작가의 편안한 안위를 나타낸다고 있다. 그런데 작품들을 제작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면 재미있는 변화가 나타난다. 드로잉 작업은 처음에는 절대조형에서 나약한 감은 있었지만, 차츰 강직한 선과 대담한 묘법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강해져 가는 것이다. 조형적으로 확신에 차가는 모습이다. 이것은 바로검은 그림 성숙과 함께 인생의 관조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작가 자신도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같다고 하였다. 앞으로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필자가 서두에서 『주역』의위대한 거론한 것도 이렇게 계속해서 새롭게 전개시켜 나가는 작가의 참그림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검은 그림에서의 치열함과밝은 그림에서의 심리적 편안함이 결합하여 총체적인 승화로 나아갔으면 한다.

 

 

 

 

 

 

 

 

 

 

 

 

 

지우기를 통해 일구는

 

정문경의 길展에 부처

 

 

 


미술평론가/중앙대학교수

 

  

 

 

정문경의 작업은 덧칠된 화면을 지워내는 것을 주된 방법으로 삼고 있다. 표면에 가득 채워진 채묵이 건조되기를 기다려 작가는 위에 행위를 가한다. 때로는 줄기의 선묘를 실행하거나 물감을 반복해 흘리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바탕의 비워진 공간으로부터 영양분을 받고 있다. 은밀하게 자리잡은 형상은 대부분의 경우 윤곽을 파악할 없고 붓의 반복적 터치로 얼룩진 빛깔을 품고 있다. 또한 붓자국이 건조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발묵 효과는 화면에 어떤 시간의 흔적을 암시하는데 도움을 준다.

 

정문경의 지워내기 작업은 생산된 작품 자체 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작 과정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지워내는 행위의 프로세스는 절제된 드로잉의 그것과 함께 작가에게 특별한 상징성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화면을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정신의 텃밭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일구기에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우기 작업은 현실을 사는 작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하나의 방식이면서 생성과 소멸사이에 운행되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라 있을 것이다. 그의 화면에 그리다 만것같은 설익음이 그대로 남아 있음에도 거기에는 명상의 발자욱과 묵시적인 시정이 담겨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점의 그림을 마무리하는데 필요 이상의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고 있는 것에 힘겨워한다. 이는 완성된 작품 못지 않게 작품 제작의 과정을 중요시하는 그로서는 필연적 현상으로 보인다.

 

결국 정문경은 자신이 내세우는 프로세스의 개념을 길이라는 대상을 통해 화면에 가시화시키고 있다. 길은 목적된 장소가 아니라 어디론가 이끄는 과정 자체를 의미한다. 삶의 현장에서 그것은 인생 행로를 상징하기도 하고 절대 가치를 위한 수도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정문경의 작업은 지식과 욕망을 떠난 무목적인 실천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적 세계에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역할은 종교적 실천이 아니라 예술적 표현에 의해 본질을 구하는 것이다. 정문경의 경우 지워내기의 과정과 길의 표상은 결국 화면을 둘러싼 형식의 테두리 안에서 창작 행위의 당위성이 주어지고 있다.

 

정문경의 화면에는 대상으로서 길의 형상은 실재 존재하지 않으며 암시적인 개의 선이나 색면으로 표상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현실적인 길의 형태를 찾으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중첩된 붓자국에 의해 화면 위에 새겨진 선묘와 절약된 색의 양괴는 때로 자연 풍경의 부분들로 보이기도 한다. 그의 그림은 복합적인 인식의 세계이며 개체적 형상을 떠나 인생의 노정에서 마주치는 종합적이고 직관적인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특정 대상의 외형적 묘사나 문학적 서술이 배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추상적 이미지들은 직관에 의해 독특한 울림과 함께 자연의 리얼리티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정문경의 작품에서는 지워내기를 거쳐 형성된 바탕의 기운보다 위에 가해진 드로잉 행위의 결과가 강조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들어 물방울이 흘러내리면서 남긴 자국과 연꽃이나 나무 뿌리 그리고 열매를 연상케 하는 절약된 형태들이 자신의 표현성을 주장하며 화면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들은 화면 위에서 작가가 시도하는 적극적인 지우기 행위와 상충되는 요인들로 여길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에서 비워낸다는 것은 적절한 것을 찾아 채운다는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정문경의 지워내기는 채우기를 위한 변주곡으로 해석될 수도 있음을 간과할수 없을 것이다.

 

속도와 소음 그리고 정보와 폭력이 홍수처럼 쏟아져 넘치는 시대에서 정문경의 지우기 작업은 도시 전체에 덮인 스모그를 씻어내는 빗줄기들처럼 정겹다. 그러나 작가의 화면은 자연의 질서를 나타내는 서사시가 아니라 자연을 지향하는 일련의 서정시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도심에 뿌리내린 자신의 삶으로부터 형성된 사색과 소박한 시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의 유학 생활을 통해 자신이 내면에서 상반된 문화의 상념들을 조화시키려 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뒤로하고 작가는 이제 자연에서 찾은 심연의 오솔길을 품고 있다.